농심몰

  대한민국의 면 문화는 거대한 변화를 맞고 있다. 국물은 차가워지고, 아예 국물이 없는 비빔면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다. 밥이 하늘이던 한국인에게 면이 대중적으로 다가온 건 20세기의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메밀로 만든 냉면이 평양과 경성에서 유행했고, 일식 면인 우동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1960년대 분식 장려운동기에는 중국식 짜장면과 짬뽕이 면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한국인 고유의 칼국수가 한국식 면식의 서막을 올렸다.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의 면식 문화는 최근 들어 화려하게 만개하고 있다. 그것도 외국의 면 문화가 아닌 한국의 고유의 면 문화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찬 국물을 먹는 민족답게 찬 국물 중심의 면 문화가 서울에서는 냉면으로 부산에서는 밀면으로 꽃피우고 있다. 냉면이 서울을 벗어나기 힘들 듯 밀면도 거의 부산에서만 대중적인 음식 문화가 되었다.  

밀가루 국수의 대중화

  부산은 1876년 일본의 강제 개항 이후 일본의 관문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부산 구포에는 ‘남선곡산’, ‘영남제분’, ‘조선도정’ 같은 밀가루 제면 공장이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구포 일대와 부산의 산동네에 정착한 실향민들에게 구포국수는 생명을 연장 시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구포와 주변 일대에는 전성기인 1960~70년대에는 국수공장이 30여 곳이나 있었다. 전쟁 이후 부산에 대거 정착한 실향민들을 통해 북한식 면 문화인 압출 방식의 뽑아 내기 기술이 밀가루 면 문화에 결합된다. 밀면은 북한의 면 뽑기 기술과 부산의 칼국수와 소면국수 전통이 결합돼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밀면의 창세기

<사진 1. 내호동 모습(왼쪽)과 내호냉면(오른쪽)>

  부산 우암동 입구에 작은 상가 맨 위쪽에 위치한 내호냉면은 자타가 공인하는 밀면의 창시자다. 지금의 자리에 1953년 3월 고향 이름을 딴 식당을 열었다. 창업자는 1919년 10월 함경남도 흥남 내호리에서 ‘동춘면옥’을 운영했었다. 부산에서는 고향에서 국수를 만들 때 쓰던 감자전분은 구하기 어려웠고 전쟁 구호품인 밀가루가 흔했다. 거기에 남쪽 지역의 구황작물인 고구마 전분은 싸고 구하기 쉬운 재료였다. 북한에서 만들어 팔았던 질긴 함흥식 면발과 매운 맛도 부산 사람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음식 문화였다. 여러 시도 끝에 1959년에 밀가루 7에 고구마 전분 3의 비율로 만든 면발이 만들어졌다.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이 섞인 밀면은 '경상도 냉면’, ‘부산냉면’, ‘밀냉면’으로 불리다 1970년대 이후 100% 밀가루만을 사용하면서 ‘밀가루 면’이라는 뜻의 ‘밀면’으로 정착한다.  

  당감동의 험한 산에도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당감시장 입구에 ‘당감제일냉면’, ‘시민냉면’이 초창기 자리를 잡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시장 근처에는 ‘흥남냉면’이 아직 남아있다. 시민냉면의 밀면은 물과 비빔의 구분이 없다. 비빔 형태의 밀냉면이 육수가 든 주전자와 함께 나온다. 처음부터 주전자에 나온 냉 육수를 부어먹거나 나중에 육수를 따라 먹어도 된다. 춘천 지역의 막국수 문화와 닮았다. 이런 방식을 부산의 면 마니아들은 '당감동 스타일' 혹은 변신한다는 의미로 '트랜스포머'라 부른다. 시민냉면뿐만이 아니라 당감제일냉면과 흥남냉면이 다 이런 당감동 스타일의 면을 만들어 낸다.  

밀면의 완성기

<사진 2. 개금시장 입구(왼쪽)와 개금밀면(오른쪽)>

  1966년 개금 시장 입구에서 영업을 시작한 ‘개금밀면’과 1968년 가야 2동 동의대 입구역 언덕 초입에 ‘가야밀면’이 문을 열면서 밀면은 완성된다. 개금골목시장 한 켠에 위치한 개금밀면은 100% 밀가루로 만든 면에 닭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하는 맑은 국물로 유명해졌다. 현재 부산 밀면 국물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한약재 육수를 사용해 단맛이 강한 국물을 내는 집들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개금식 육수’로 불린다.  

가야밀면의 한약재 국물

  내호냉면에서 시작된 냉면의 부산식 변형은 가야밀면에 의해 마무리된다. 100% 밀가루면과 한약재가 들어간 국물을 사용한 밀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초읍동에 위치한 ‘삼성밀면’은 초기 가야밀면의 레시피가 남아있는 곳이다. 삼성밀면의 면은 탄력 있고 직접 만든 면에서만 나는 부드러움이 있다. 면 반죽은 국수 삶은 물로만 밀가루를 넣어 반죽한다. 9시에 반죽해서 11시부터 사용한다. 밀가루나 물은 다른 식당과 같지만 끓일 때의 불 온도와 건질 때의 타이밍이 면의 상태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틀에서 내려 1분 정도 삶은 뒤 얼음물에 씻어낸다. 얼음물에서 사리를 꺼내 끝이 탁 튀어 오르면 탄력 있는 면인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육수는 한약재 맛이 강하지만 부산 분들은 달달하고 강한 이 한약재 육수를 좋아한다.  

  한약재는 왜 국물에 사용됐을까? 삼성밀면 창업주에 의하면 한약재는 밀가루 냄새를 잡아주고 달고 강한 음식을 좋아하는 부산 분들의 식성에도 맞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밀면의 또 한 축인 다대기의 매운 맛을 중화시키고 단맛을 증폭시킨다. 한약재만의 국물에 다대기를 풀면 전혀 다른 음식으로 변한다.  

기계식 면발은 수제 면발이다.

<사진 3. 밀면 식당의 ‘기계밀면’ 문구>

  부산의 밀면 명가들은 하나같이 육수를 직접 만들고 면을 직접 뽑아 낸다. 밀면집에는 기계식밀면이라는 문구가 붙은 집들이 많다. ‘그런데 기계식이란 이름 때문에 오해가 있는데 이는 손 반죽 후에 면을 뽑을 때 기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방앗간에서 만든 면을 많이 사용했는데 밀면 집들에 공급된 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 방부제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가게들이 직접 면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밀면이 부산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게 됐다는 것이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손으로 면을 직접 반죽해서 기계에서 뽑는 '기계식냉면'이 시작되면서 밀면은 부드러운 질감과 글루텐 때문에 생기는 탄성을 지닌 독특한 면발의 특성이 강화된다. 북한 냉면 문화의 멋진 변주가 완성된 것이다. 메밀로 만든 면발보다 탄력이 있으면서 부드러운 면발은 한국 면의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 출처 :  누들푸들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